W를 찾아서 (박경철 강연, ETF 적립식, 퇴직 후 W 찾기)

1993년, 서울의 한 경제연구소 강당. 찢어진 청바지에 UCLA 티셔츠를 입은 강연자가 칠판에 "WWW"라고 쓰고는, 머지않아 이 안에 은행도 들어오고 신문사도 들어오는 세상이 온다고 말합니다. 박사급 연구원들은 30분 만에 거의 다 자리를 떴습니다. 그런데 객석에 있던 한 백수는 강연이 끝나자 주차장까지 강연자를 쫓아가 "저는 W를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리스펙 투자플랜 채널의 "30년 전 인터넷, 그리고 지금" 1,000배 커질 부의 기회가 보인다 영상은 시골의사 박경철 씨의 2008년 강연, 일명 "W를 찾아서"를 소개합니다. 그 백수는 나중에 국내 첫 상용 이메일 서비스를 만들었고, 같은 강연을 들은 박경철 씨는 그 이야기를 망상으로 흘려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박경철 씨를 좋아해서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같은 책도 사서 읽었고, 그의 강연도 꽤 많이 찾아봤습니다. 이번 영상도 유튜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보게 됐는데, 예전에 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들렸습니다. 그때는 회사에 다니던 사람으로 들었고, 지금은 그 W를 찾겠다고 회사를 나온 사람으로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상 위의 박경철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책
오래전에 사서 읽은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0.1%, 0.9%, 99%라는 W 이야기의 구조

강연의 뼈대는 단순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것(W)을 처음 내놓는 0.1%의 창의적인 사람, 그것을 알아보고 뛰어드는 0.9%의 안목 있는 사람, 그리고 "세상 참 좋아졌다"고 말하며 뒤따라가는 99%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직 기계 옆에서 양 목장을 연 사람, 포드의 자동차 옆에서 주유소를 세운 사람, 반도체를 보고 개인용 컴퓨터를 조립한 사람이 모두 0.9%의 예로 나옵니다.

박경철 씨 자신은 이메일 때는 99%였지만, 몇 년 뒤 휴대폰을 보고 "이게 W구나"를 알아챘다고 말합니다. 직접 사업을 할 수 없으니 이동통신 회사 주식을 월급 받을 때마다 사 모았고, 그것을 "주식 투자가 아니라 W 버스에 올라탄 차비"라고 표현합니다.

영상을 보면서 저도 자연스럽게 같은 질문을 하게 됐습니다. 나는 어느 쪽이었을까.

99%였던 시간, 그리고 ETF 적립식으로 바꾼 이유

솔직히 말하면 저는 오랫동안 99% 쪽이었습니다. 개별 종목을 사고팔면서 같은 실수를 10년 넘게 반복했고, 한때는 유료 주식 방송에 가입해 전문가가 찍어 주는 종목을 따라 사기도 했습니다(ETF 적립식 투자 방법). 영상 후반부에 "세상의 수많은 돈키호테가 자신이 W라고 외친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돌아보면 저는 W를 찾은 게 아니라 W라고 외치는 목소리를 따라다녔던 셈입니다.

그래서 방식을 바꿨습니다. 무엇이 W인지 내 눈으로 가려낼 자신이 없으니, 시장 전체를 담는 지수 ETF를 매달 같은 날 같은 비율로 사는 쪽으로요. 흥미롭게도 영상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면 미국 지수 ETF를 적립식으로 사면서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W를 직접 고르지 못해도, W가 지나가는 시장 전체에 올라타 있으면 적어도 버스를 통째로 놓치지는 않는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2020년 초등학교 2학년이던 딸에게 처음 사 준 주식이 아이폰을 만드는 회사였던 것도, 몇 달 전 그 계좌에 미국 빅테크 7개를 담은 MAGS를 더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딸 계좌 미국 ETF 투자). 제가 0.9%라서가 아니라, 0.1%와 0.9%가 만든 회사들이 모인 바구니를 아이 계좌에 오래 넣어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편한 것은 아닙니다. 이 블로그에도 적립식 투자와 ETF 이야기를 여러 번 썼지만, 속으로는 저도 W를 빨리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시장 전체에 올라타 있는 것은 버스를 놓치지 않는 방법이지, 내가 탈 버스를 직접 고르는 방법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W, 공사 현장에서 먼저 보였다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것은 있습니다. 26년 동안 토목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라 그런지, 저는 W를 책이나 강연보다 공사 현장에서 먼저 보게 됩니다.

요즘 청주 테크노폴리스를 지날 때마다 SK하이닉스가 약 19조 원을 들여 짓는 P&T7 공장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AI 반도체의 핵심인 HBM을 마무리하는 공장이라고 합니다(청주 SK하이닉스). 빈 땅에 펜스가 둘러지고, 터파기가 시작되고, 철골이 올라가는 순서는 제가 평생 해 온 일입니다. 그 순서를 알기 때문에, 저런 규모의 공사가 시작됐다는 건 누군가 그 산업에 10년, 20년짜리 돈을 걸었다는 뜻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그 W를 쓰고 있습니다. 퇴직 후 블로그를 쓰면서 예전 같으면 며칠 걸렸을 자료 조사를 AI의 도움을 받아 몇 시간 만에 끝냅니다(AI 지렛대 시대). 박경철 씨가 기차 안에서 처음 휴대폰을 꺼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던 것처럼, 몇 년 뒤에는 지금의 AI 사용도 그렇게 기억될지 모르겠습니다.

W 이야기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본 대목

강연이 주는 울림은 큽니다. 다만 투자자의 입장에서 몇 군데는 한 발 물러서서 들었습니다.

첫째, 강연 속 역사는 메시지를 위해 압축된 이야기입니다. 강연에서는 록펠러가 포드의 자동차를 보고 주유소를 먼저 세워 석유 시장을 차지했고, 1940년대에 독점 때문에 공정거래법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은 자동차가 대중화되기 전인 1870년에 세워졌고, 1890년에 이미 미국 석유 시장의 88%를 차지했으며, 1911년에 반독점법 위반으로 해체됐습니다(스탠더드 오일). 포드의 대중형 자동차인 모델 T가 나온 것도 1908년입니다(포드 모델 T). 강연의 교훈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사실로 그대로 옮겨 적기보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비유로 받아들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W를 맞혀도 돈을 버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인터넷은 분명 W였지만, 2000년 닷컴버블 때 인터넷 회사라는 이름만 달고 사라진 기업이 훨씬 많았습니다. 방향을 맞히는 것과 그 방향에서 살아남을 회사를 고르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박경철 씨도 1999년 말에 "한 시대가 끝났다"며 주식을 정리했다고 말합니다. W에 올라타는 것만큼 언제 내릴지도 중요했던 셈입니다.

셋째,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에는 실패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백수처럼 강연자를 붙잡고 뛰어들었다가 아무것도 못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는 강연에 나오지 않습니다. 영상이 스스로 "돈키호테 1만 명 중 진짜는 한 명"이라고 짚은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W를 빨리 찾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W라고 외치는 목소리에 더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점도 함께 기억하려고 합니다.

26년 다닌 회사를 나온 이유, 그리고 아직 보이지 않는 W

저는 올해 8월, 26년 다닌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10년 뒤 정년에 밀려 나와서 그때 새 일을 찾는 것보다, 10년이라도 먼저 나와서 찾는 편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제 나름대로는 이 시대의 W를 찾으러 나온 셈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회사를 나왔다고 W가 갑자기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제가 가장 공감한 대목은 따로 있었습니다. 박경철 씨가 자기 눈에 W가 보이지 않자 의사 일까지 그만두고, 10개월 동안 자기보다 많이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들었다는 부분입니다. 그 대목을 들으면서 뜨끔했습니다. 저는 퇴직하고 나서 W를 찾겠다면서 정작 사람을 만나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인터넷 속에서만 찾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뉴스를 읽고, 영상을 보고, 블로그에 정리하는 일은 했지만, 그 분야에서 실제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본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은 당장 들어오는 수입이 없다는 게 컸던 것 같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데는 시간도 돈도 들고, 그게 언제 무엇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용이 들지 않는 인터넷 안에서만 맴돌았던 겁니다. 그런데 박경철 씨도 그 10개월 동안 수입을 내려놓고 밥을 사고 술을 사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내 눈에 안 보이면 다른 사람의 눈을 빌리면 된다는 그의 말이, 이번에는 조언이 아니라 숙제처럼 들렸습니다.

강연 마지막에 박경철 씨는 "10년 후의 W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아직 두 시간은커녕 10분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장 전체를 담은 ETF로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일은 계속하면서, 이제는 화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합니다. 회사를 10년 먼저 나온 이유가 거기에 있었으니까요.

이 글은 제 개인 경험과 의견을 정리한 것이며 특정 상품이나 종목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과 그 결과는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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