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조기퇴직 한 달 반 (FIRE, 4% 인출, 시간 계산)

영상 속 김정호 씨는 쉰한 살에 29년 다닌 식품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저는 26년 토목 현장 생활을 마치고 올해 8월 31일에 퇴직했습니다. 나이도, 회사를 다닌 햇수도, 정년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왔다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인생 채널의 50대에 조기퇴직하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51세에 경제적 자유와 조기은퇴(FIRE)를 이룬 사람의 실제 이야기 영상을 보는 내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영상은 퇴직 후 반년 동안 그가 겪은 일을 시간 순서대로 보여 줍니다. 저는 이제 퇴직한 지 한 달 남짓 됐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은 그의 시간표 옆에 제 시간표를 나란히 놓는 방식으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퇴직 전: FIRE를 위한 돈 계산은 저도 했습니다

그의 경우. 퇴직금과 예금, 투자 자산을 합쳐 금융자산은 약 8억 원이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았고, 물려받은 아파트가 있어 대출도 월세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바로 사표를 내지 않고 몇 달 동안 엑셀로 생활비, 병원비, 아파트 수선비, 건강보험료, 하락장에서의 생활비 마련까지 계산했다고 합니다.

제 경우. 저도 퇴직 전 몇 달은 계산의 연속이었습니다. IRP와 ISA, 연금저축펀드를 하나씩 열어 봤고, 퇴직하면 건강보험이 어떻게 바뀌는지 찾아봤습니다. 퇴직금은 1억 후반대였는데, 연금으로 나눠 받으면 세금을 더 아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시금으로 받는 쪽을 택했습니다(퇴직금 IRP 수령 후기). 월급이 끊긴 상황에서는 세금 몇백만 원보다 당장의 현금 흐름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영상 속 그가 엑셀을 붙잡고 있었던 마음을 저는 잘 압니다.

퇴직 한 달: 시간 계산 없이 떠난 그, 책상에 앉은 저

그의 경우. 첫 한 달은 오히려 바빴다고 합니다. 집을 정리하고, 평일 온천과 텅 빈 영화관을 즐겼습니다. 두 달째에는 오래 꿈꾸던 전국 자전거 여행을 떠났지만 3주 만에 돌아왔습니다. 돈도 체력도 아닌,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제 경우. 퇴직하고 가장 먼저 달라진 건 금요일 오후였습니다. 재직 중에는 금요일마다 의정부에서 청주까지 2시간 넘게 고속도로를 달렸는데, 지금은 그 시간에 책상에 앉아 있습니다(럭셔리 경험 소비). 그 책상에서 제가 하는 일은 블로그 글을 쓰는 것입니다. 퇴직 직전인 7월에 "다음에 뭘 하며 살아갈지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이 블로그도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 같다"고 적었는데(퇴사하면 건강보험은?), 돌아보면 그 말대로 되고 있습니다. 퇴직을 앞둔 8월에는 이 블로그와 별도로 26년 토목 현장 경험을 정리하는 블로그도 하나 더 시작했고, 퇴직 후 한 달은 두 블로그에 글을 쓰며 보냈습니다.

퇴직 후 아침마다 블로그 글을 쓰는 책상
퇴직 후 출근 대신 앉는 책상

현장에 있을 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감리, 발주처, 협력업체와 쉬지 않고 통화하고 협의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일의 피로였는데, 영상 속 그가 "회사는 월급만 주던 곳이 아니라 사람과 연결되고 역할을 부여받는 곳이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저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은, 그 역할을 작게나마 제 손으로 다시 만드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퇴직 한 달 반: 돈에는 고지서가 오지만 시간에는 오지 않습니다

그의 경우. 직장에 다닐 때는 월급에서 알아서 빠지던 세금과 보험료가 퇴직 후에는 통장에서 직접 빠져나가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고 합니다. 계산할 때 이미 예상했던 금액인데도 말입니다.

제 경우. 저는 반대였습니다. 퇴직 후 첫 지역가입자 건강보험료 고지서는 46,010원이었습니다. 직장 다닐 때 내던 33만 원의 14% 수준이었습니다(퇴직 후 첫 건강보험료 고지서). 몇 달을 걱정했던 숫자가 생각보다 훨씬 작았습니다. 그래서 영상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돈 계산은 생각보다 맞아떨어질 수도, 빗나갈 수도 있지만, 적어도 고지서라는 답이 옵니다. 그런데 시간에는 고지서가 오지 않습니다. 하루를 어떻게 썼는지 알려 주는 사람은 저 자신밖에 없습니다.

FIRE와 4% 인출 원칙을 보며 든 생각

"일이 없는 삶과 할 일이 없는 삶은 다르다." 영상의 마지막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는 돈은 계산했지만 시간은 계산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FIRE를 준비하는 사람뿐 아니라, 저처럼 정년보다 조금 일찍 회사를 나온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몇 가지는 영상을 보면서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첫째, 이야기의 조건이 저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는 혼자 살았고, 대출 없는 아파트와 8억 원의 금융자산이 있었습니다. 같은 50대 퇴직이라도 가족이 있는지, 주거비가 드는지, 자산이 얼마인지에 따라 퇴직 후의 고민은 전혀 달라집니다. 그의 외로움은 공감하면서도, 그의 숫자를 제 계획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또 영상은 1인칭 이야기 형식이라, 한 사람의 실제 사례인지 여러 사례를 엮어 재구성한 이야기인지는 영상만으로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숫자보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교훈 쪽에 무게를 두고 봤습니다.

둘째, 4% 인출 원칙은 영상 속 단서까지 같이 봐야 합니다. 영상은 4% 원칙을 소개하면서 절대적인 공식은 아니라고 분명히 짚었는데, 저는 이 단서가 꽤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4% 원칙은 1994년 미국의 재무설계사 윌리엄 벤젠이 미국 주식과 채권의 과거 수익률로 은퇴 후 30년을 버틸 수 있는 인출률을 계산한 연구에서 나왔습니다(Bengen, 1994). 쉰 살 무렵에 퇴직하는 한국 사람은 30년보다 긴 기간을 생각해야 하고, 국민연금을 받기 전까지의 공백과 건강보험료도 따로 계산해야 합니다. 미국 기준의 4%를 그대로 가져오기보다는 출발점 정도로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재취업 이야기는 생각할 거리를 남겼습니다. 그는 돈 때문이 아니라 하루의 구조를 만들고 싶어 다시 일을 찾았지만, 면접까지 간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보면서 "회사를 나온 뒤에 회사로 돌아가는 길"보다 "회사 밖에서 내 역할을 만드는 길"을 먼저 준비해 두는 게 현실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가 결국 자전거 가게의 작은 모임에서 답을 찾은 것처럼 말입니다.

퇴직 후 시간 계산, 제가 앞으로 할 것

영상 속 그는 쉰한 살에 가장 늦게 계산한 것이 돈이 아니라 하루하루였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계산을 조금 일찍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 돈: 지금처럼 고지서와 계좌를 기록하면서, 생활비가 원금을 건드리지 않는 구조를 먼저 만듭니다(퇴직자 1억 투자).
  • 하루: 아침에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을 하루의 기둥으로 삼습니다. 출근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할 고정된 시간입니다.
  • 사람: 영상 속 그가 자전거 모임에서 답을 찾았듯, 저도 회사 밖에서 이어질 연결을 일부러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블로그로 만나는 독자도,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멀어질 옛 동료도 그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상 속 그의 달력에는 아직도 빈칸이 많지만, 이제는 그 빈칸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도 퇴직 한 달 반째인 지금, 제 달력의 빈칸을 조급해하지 않고 하나씩 채워 가 보려고 합니다.

이 글은 제 개인 경험과 의견을 정리한 것이며 특정 상품이나 종목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과 그 결과는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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